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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사르비아총서 614)

일반인을 위한 철학 교양서. 대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막중한 정무에 종사하면서도 언제나 깊은 철학적 사색을 생명으로 삼고 살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고매한 양심이 자신과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운 구도의 기록을 전12장에 걸쳐 담아냈다. 고전(古典)은 인류의 정신적 유산(遺産)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만인에게 정신의 소중한 양식(糧食)이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의 《명상록》도 이런 고전의 하나로 널리 읽히고 있다. 플라톤은 철인(哲人) 정치를 이상(理想)으로 삼았으나 이 이상은 역사상 오직 한 번 실현된 적이 있다. 그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하던 시기다. 그는 대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다망한 공무(公務)에 종사하면서도..
일반인을 위한 철학 교양서. 대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막중한 정무에 종사하면서도 언제나 깊은 철학적 사색을 생명으로 삼고 살았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고매한 양심이 자신과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운 구도의 기록을 전12장에 걸쳐 담아냈다.
고전(古典)은 인류의 정신적 유산(遺産)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만인에게 정신의 소중한 양식(糧食)이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의 《명상록》도 이런 고전의 하나로 널리 읽히고 있다.

플라톤은 철인(哲人) 정치를 이상(理想)으로 삼았으나 이 이상은 역사상 오직 한 번 실현된 적이 있다. 그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하던 시기다.

그는 대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다망한 공무(公務)에 종사하면서도, 후기 스토아 학자의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언제나 깊은 철학적 사색을 생명으로 삼고 살아왔다. 그는 체계적인 철학 연구나 저술을 할 틈이 없었으나, 수시로 머리 속에 떠오르는 감회나 상념의 조각들을 단편적이나마 희랍어로 기록해두곤 하였다. 그것이 오늘날 《명상록》, 또는 《자성록(自省錄)》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바로 이 수기(手記)다.

그것은 때로는 국경에서, 때로는 멀리 북방 변경의 진중(陣中)에서 기록되었으며, '자기 자신에게(ta eis eauton)'라는 원제(原題)가 말해주듯이, 본래 남에게 읽히기 위해서 씌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체의 구성이나 문장이 정리되어 있지 않고 난해한 여러 대목이 눈에 뜨인다. 또한 사본(寫本)이 잘 보존되지 않아 텍스트 자체의 오류(誤謬)나 불투명한 문맥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일찍이 존 스튜어트 밀이 지적한 바와 같이 '고대 정신의 가장 고귀한 윤리적 산물'로서 고금(古今)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그것은 테에느의 말대로 이 책 속에 '세상에 태어난 자들 가운데 가장 고귀한 영혼을 소유했던 자의 영혼'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는 기원후 121년 4월 26일 로마에서 아버지 안토니누스 웨루스와 어머니 도미티아 루키라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마 총독, 집정관, 원로원 의원 등을 역임한 안토니누스 웨루스의 아들로 집정관(執政官)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두 번이나 집정관을 지낸 루키우스 카틸리우스 세웨루스의 손녀였다. 마르쿠스가 8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 후에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마르쿠스는 몸이 약하여 학교에 다니는 대신 가정 교사에게서 공부했으며,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는 원래 성실하고 근엄하여 12세 때 이미 철학자들이 입는 거친 양털옷을 걸치고 공부에 열중하는 한편 이른바 '희랍적인 훈련'을 받아 육신도 엄격히 절제하였다. 마르쿠스는 처음에 문학, 음악, 무용, 회화 등을 공부했으나 이윽고 철학에 이끌려 이에 전념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17세 때,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세상을 떠나고 그 유지(遺志)에 따라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후계자로 즉위하고 마르쿠스와 루키우스 웨루스가 안토니누스의 양자가 되었으나, 안토니누스는 마르쿠스를 자기의 후계자로 공표하였다. 마르쿠스는 26세 때 안토니누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하고 양부(養父) 안토니누스를 도와 국정에 참여하였다.

기원후 161년에 안토니누스가 세상을 떠나자 원로원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후계자로 맞아들이려고 했으나, 마르쿠스는 선제(先帝) 하드리아누스의 유지를 존중하여 의제(義弟)인 루키우스 웨루스를 자기와 동등한 지위로 끌어올려 두 사람이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의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의 표시로 자기의 큰딸 루킬라와 결혼하게 하였다. 그런데 루키우스는 나태하고 향락을 즐겨, 황제가 되어서도 국정을 돌아보지 않고 막중한 책임을 소홀히 했다. 그러나 마르쿠스에 대하여는 시종 존경과 우정을 잃지 않았으며, 마르쿠스도 그를 관대히 대하였다.

독서와 명상에 잠기는 것을 무엇보다도 낙으로 삼는 내향적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황제로서의 책임을 한 몸에 짊어지고 나라 안팎의 치리(治理)에 골몰하며 나날을 보내는 것은 결코 달가운 일이 못 되었다. 그러나 의무 관념이 강한 그는 전력을 기울여 소임을 다하였으며 또한 자기의 이상을 국정에 반영하려고 애썼다.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온 로마 제국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가 되자 다사다난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가 즉위하자마자 북방 게르만인들이 난동을 일으키고 티베리스 강의 범람, 지진 등 연이은 재난이 덮쳐왔으며, 시리아에 침입하려고 한 파르티인들과의 전쟁도 일어났다. 마르쿠스는 루키우스를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루키우스는 별로 한 일이 없으나 로마군은 승리하여 166년에 개선했다. 그런데 이때 묻어온 페스트의 병독이 번져 라인 강가에까지 이르러 백성과 가축의 무리가 떼죽음을 당하였다. 이 전염병과 이에 따르는 기근의 와중에서 게르만 민족의 일파인 마르코마니인이 다른 종족과 함께 이탈리아의 북방에 쳐들어왔으므로, 마르쿠스는 루키우스와 함께 원정(遠征)하여 외적을 물리치고 돌아왔으나, 도중에 루키우스가 병으로 죽자(169) 그 후에는 마르쿠스가 혼자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의 재위 중에는 전란이 그치는 날이 거의 없었으며, 언제나 전선에서 진두지휘를 하여야 했다. 그는 인정(仁政)에 의해 만인의 경애를 받고 있었으므로 사후 1세기 동안은 많은 가정에서 그를 집안의 수호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사학자 기번(Edward Gibbon)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를 평하여, "그는 로마 제국을 42년 동안 끊임없이 예지와 인덕(仁德)으로 다스렸다. 그의 치세야말로 대민족의 행복을 통치의 유일한 목표로 삼은 역사상 유일한 시기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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