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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학문ㆍ정치 (범우문고 119)

막스 베버의 사상은 '20세기 사상계의 커다란 봉우리'라고 말한다. 이는 그의 사상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그의 사상적 깊이가 그만큼 깊어서 그 뜻을 쉽게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전반적인 사상체계를 한 번에 안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한 단계씩 사상체계를 이해해나간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소개하려고 하는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그의 사상을 철학적 문장체가 아닌 회화적 문장체로 사회현실을 솔직하게 고발하는 글이다. 이 두 편의 논문을 통해 그의 기본 사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본서를 출간하는 의의가 있다.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막스 베버의 사상은 '20세기 사상계의 커다란 봉우리'라고 말한다. 이는 그의 사상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그의 사상적 깊이가 그만큼 깊어서 그 뜻을 쉽게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전반적인 사상체계를 한 번에 안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한 단계씩 사상체계를 이해해나간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소개하려고 하는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그의 사상을 철학적 문장체가 아닌 회화적 문장체로 사회현실을 솔직하게 고발하는 글이다. 이 두 편의 논문을 통해 그의 기본 사상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본서를 출간하는 의의가 있다.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뮌헨대학 근처에 있는 슈다이니케라는 서점의 작은 홀에서 행해진 강연이다. 이 강연은 자유주의 좌파를 정치적 신조로 하는 학생집단인 '자유학생동맹'이 기획한 일련의 강연 스케줄의 하나로 행해졌다. 원래 그들은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주제로 한 연설을 먼저 요청했으나 베버는 이를 거절하고 <직업으로서의 학문>으로 주제를 고쳐 허락했다.

그러나 그후 베버는 이들 학생연맹이 당시 바이에른 혁명의 지도자였던 쿠르도 아니스나에게 이 제목으로 강연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니스나의 행동은 결국 점령군의 전면적인 지배를 불러일으켜 패전국인 독일을 더욱 약화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생각할 여지도 없이 그 강연을 승낙하고 두 강연을 연이어 하게 되었다.

강연시기는 1919년 1월 16일에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먼저 강연되었고,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1월 말쯤으로 정확한 날짜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이들 강연은 학문과 정치 중에서 한 쪽을 택해야 했던 긴장 속에서 태어난 사상가 막스 베버의 유언과도 같은 것으로, 베버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두 논문은 반드시 같이 읽어야 한다고 본다.

강연의 주요 내용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의 경우 크게 학문의 의의와 학문과 인간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학문의 구체성, 문화에 대한 분석, 학문의 진보, 합리화의 과정, 무의미한 현실, 학문가치의 역사와 학문가치의 자유성, 교단에서의 금욕의 필요성, 학문의 기능 등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는 근대국가의 특징, 직업적인 정치가의 성격 규명, 민주주의를 인도해야 하는 지도자의 자질,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등을 중심으로 논하고 있다.

더 구체적인 내용은 본문을 참고해주길 바라며, 끝으로 독일 민주당의 창당과 함께 남독일에서 행한 강연회를 평한 주최측의 편지를 소개하여, 그가 얼마나 당시 독일인들에게 감명과 용기를 주어 패전의 슬픔에 처해 있던 그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 했었는가를 이해하면서 본서의 참 가치를 깨닫길 바란다.
칼 맑스, 에밀 뒤르켐 등과 함께 현대 사회학을 창시한 사상가 중 하나로 꼽히는 독일의 사회학자. 원래 법학도였으나 점차 역사, 경제, 정치, 법제도, 종교, 철학, 예술 등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적 현상들을 자신의 인식지평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이 현상들의 사회학적 분석에 필요한 이론들과 개념장치를 구축해내었고, 이를 통해 그는 현대 사회학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1864년 상인 출신의 국회의원 아들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대학·베를린대학 등 독일 각지의 4개 대학에서 철학 ·역사학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재판소의 사법관시보(司法官試補)로 근무하는 한편, 연구를 계속하였다. 1892년 베를린대학을 시작으로 프라이부르크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 등에서 강의와 연구에 종사하였다. 베를린대학의 교수 자격 논문인 「로마 농업사(農業史)」(1891)와 프라이부르크대학 취임강연인 「국민국가와 국민경제정책」(1895) 등이 유명하다.

베버는 그의 연구 활동을 베를린 대학에서 시작했으며, 말년에는 프리부르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빈 대학교 그리고 뮌헨 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재직 중에 신경쇠약을 겪게 되었고 유럽 각지에서의 투병 생활 끝에 1902년에 다시 연구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사회 과학 및 사회 정책 잡지』의 편집을 맡았으며 「사회과학적 및 사회정책적 이식의 객관성」,「프롵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등의 논문을 집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하였으며 퇴역 후 당대 정치와 정치학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어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 제국 측 협상자로 나서기도 했으며 바이마르 헌법의 초안을 닦는 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신역사학파 또는 강단사회주의자들과 대결하였으며 가치판단 논쟁을통해 역사학파가 가지는 이론적 약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과학과 가치판단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몰가치성'을 강조하였으며 사회현상에 대해서 인식주체가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주관적으로 구성하는 '이념형'의 연구방법론을 구사하였다.

그의 주요 업적으로 종교사회학과 정치체제에서의 합리화를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거기에서 나아가, 경제 분야에 큰 관심을 두기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중 하나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이 저서에서, 종교가 서양의 다문화 현상과 동양의 발전에 대한 비배타적인 이유가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본주의, 관료제, 서유럽의 합리적-합법적 국가의 발전과 형성을 이끈 동인이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하는 부분적 특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명으로서의 정치학』이라는 그의 또 다른 주요 저서에서는 인력의 정당한 사용에 대한 전매권을 가진 자주 독립체로써의 국가를 규정지었다. 이 규정은 근대 서구 정치학 연구의 중추가 된다. 이러한 그의 규정들은 흔히 ‘베버 명제’라고 불린다.

그 외 베버의 주요 저작으로는 흔히 사회학적 개념구성의 ‘건축학’이라고 불리는『경제와 사회』, 기독교, 유태교, 유교, 도교, 힌두교, 불교 등 세계 대종교들을 다루고 있는『종교사회학 논문집』, 그의 방법론적 구상을 담고 있는『과학론 논문집』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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