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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범우문고 255)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조명희 소설집. 표제작이자 대표작인 「낙동강」은 계급사상 신봉자인 사회인동가 박성은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밖에 「땅 속으로」, 「새 거지」등 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조명희 소설집. 표제작이자 대표작인 「낙동강」은 계급사상 신봉자인 사회인동가 박성은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밖에 「땅 속으로」, 「새 거지」등 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조명희
조명희[호: 노적(蘆笛), 노월(蘆月), 목성(木星), 명희, 포석(抱石), 포석(包石) 등]는 1894년 8월 10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부친 조병행과 모친 연일 정 씨 사이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포석이 태어나던 해 이미 칠순이었던 부친은 4년 뒤 1898년에 작고했다. 어머니는 부친의 두 번째 부인으로 한문과 한글에 모두 능한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배다른 맏형인 조공희는 구한말의 관리로서 조국의 망국적 운명을 개탄하고 일제의 억압을 피해 지리산에 은신해 있기도 했다. 누대에 걸친 지배계급으로서의 가정환경은 조명희의 현실인식의 밑바탕이 된다.
1907년경에 13세의 나이로 네 살 위인 여흥 민씨와 결혼했는데, 애정이 전제되지 않은 이 조혼은 이후 그가 가정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까지 확산된다. 이 무렵 포석은 진천사립소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서울로 유학하여 셋째 형 집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당시 유행하던 '영웅숭배열(英雄崇拜熱)'에 들떠서 북경사관학교에 들어가려고 고보를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집으로 붙들려 오게 되고 이때 포석은 '소일 격(消日格)으로 소설(小說)이란 것을 읽'으며 문학을 접하게 된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몇 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동경으로 가서, 동양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 청강생으로 적을 두고 유학생들의 모임인 학우회 활동을 한다. 이때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김우진을 만나게 되는데, 둘은 문학상의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포석은 이 인연으로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일시적이나마 무정부주의 계열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해서 사상운동도 체험하게 된다. 동경에서의 생활은 힘든 것이었다. 기울어져 가는 가세로 학비를 전적으로 해결해 줄 수는 없는 일이어서 포석은 학비 구걸을 해야 했다. 그러나 가난이 그에게 상당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생활인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당할 때, 즉 귀국한 후이다. 1923년 초, 포석은 어려웠지만 자유로울 수 있었던 유학을 중도에 끝내고 귀국한다. 1924년에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다. 가족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받는 이즈음에야 그 '고통의 떡메'와 같은 현실은 그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1925년 무렵 포석은 [시대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한다. 그가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을 번역, 연재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1925년 8월 창립된 카프 회원으로 가입해 카프의 열성적인 비해소파로 꼽히는 이기영, 한설야와 이념적인 동지로서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1925년에서 1928년까지는 조명희의 창작 기간 중에서 가장 활발한 시기다. 이 시기 동안 그는 단편소설 12편과 시, 수필,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28년 여름 망명 직전에 포석은 가족을 이끌고 성공회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바 있는데, 그 심경은 짐작할 길이 없다. 그리고 얼마 후 모친에게만 하직인사를 하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포석은 종적을 감추었다. 하루쯤 지나 한 학생이 쌀 한 가마를 들여주면서 '선생님이 떠나셨다'고 알려줘서야 가족들은 비로소 그의 가출을 알았으며, 망명 사실은 한참 뒤포석에게서 단 한 번 온 편지로 알았다고 한다. 망명 후 포석은 연해주 신한촌의 중학교와 우수리스크 조선사범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1년에 황명희와 재혼했다. 구한말 전후에 두만강 건너 블라디보스토크 중심의 연해주 지역에 모여 살던 한인들의 한글신문인 [선봉]에 정기적인 문예 페이지를 마련했던 조명희는, 10년 가까이 수많은 현지의 한인 청년들에게 한글문학을 지도했다. 강태수, 김기철, 김증송, 김광현, 조기천, 김두칠, 연성용, 태장춘 등이 포석의 제자다. 이들은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된 후로 카자흐스탄 알마티 등에서 [선봉]의 후신인 [레닌기치](현 [고려일보])를 창간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글 문단을 형성해 왔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맹원이 되기도 한 포석은 단편소설과 시, 동요, 희곡, 장편소설 등에 걸치는 폭넓은 작품활동을 했다.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직전, 익명의 편지에 의해 체포되고 1938년 5월 11일에 총살당했다. 당시 가족들은 이런 정황을 제대로조명희 알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도 조명희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1956년 소련 정부 당국에 의해서 조명희에 대한 과거의 잘못된 결정을 파기하여 복권시킨 이후에, 소련 과학원에서 한글판 [조명희 선집](1959)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는 그의 자녀가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소재 국립 나보이 문학박물관에 '조명희 문학기념실'이 열린 데 이어 1992년에는 타슈켄트에 '조명희 거리'가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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