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와서야 수필이 문단 또는 일반 독서인에게 대우를 받게 되었지만, 얼마 전만 해도 수필은 한갓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는 잡문으로 취급되었다. 옛날에는 시(詩)만이 문학이지 그 외의 것은 잡문으로 여겼다. 이규보가 문명을 날리던 때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규보는 시인, 시호이지, 문인이란 말이나 더욱이 수필가라는 명칭은 당시의 문단에서는 어불성설이었다. 옛 선비들의 개인 문집이나 종합 문집에도 으레 시(詩)가 왕좌와 같이 권두에 군림하고, 잡저(雜著), 설(說), 기(記), 서(書) 등등은 뒤로 미루어서 편집했다는 사실로도 시의 우대와 시인의 명예가 얼마나 비중이 무거웠는가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문집에는 시만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수필류의 산문도 시에 못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은 전집 41권인데, 1권부터 18권까지는 시집이고 19권부터는 잡저, 설, 잡문 등의 수필들이 수록되어 있다.
≪동문선(東文選)≫에도 이규보의 글은 상당한 양이 수록되어 있는데 시 양식에 드는 작품이 62수, 서간문이 45편, 기(記)가 21편, 서(序)가 7편, 설(說)이 12편, 발(跋)이 5편, 잡저 4편으로 이 양식들은 모두 수필문학의 범주에 들 수 있다. 이것만도 94편인데 시보다 훨씬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밖에도 수필적 성격을 띤 제문(祭文), 축문(祝文), 비명(碑銘) 등이 20여 편이 있다.
동방의 시호인 이규보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국선생전> 등의 의인체 소설도 많다)의 작가로, 또는 많은 수필을 발표한 수필가로서도 재인식되어야 할 문인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문학사에서 그의 소설은 많이 소개되고 또 연구되었지만 수필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외면해 온 경향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수필류가 모두 한문으로 씌어졌다고 해서 등한시되기도 했지만 이는 한글 이전의 사실이므로 한국 문학사에서 굳이 이를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여기 한문 문체(文體)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하겠다. 이것이 한문 수필의 형식과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문집인 ≪동문선≫에만도 시를 비롯해서 무려 40여 종의 양식이 있다. (조칙(詔勅)ㆍ교서(敎書)ㆍ제고(制誥) 등 왕이 내리는 글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는 물론 산문이 훨씬 많다. 그런데 상식으로는 소위 잡저(雜著)만이 오늘의 수필과 같은 양식으로 보기 쉬우나, 이는 이름 그대로 신변잡기이다. 이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기, 설, 잠(箴) 등도 있다.
이러한 이론을 근거로 하여 본고에는 여러 가지 양식-수필로 볼 수 있는-의 글을 선택하여 수록하려고 노력했다. 본문을 읽으면 충분히 이해가 되겠지만 간단하게나마 설명을 하겠다.
이규보(李奎報) 지음
장덕순(張德順) 옮김
고려의 문신, 시호(詩豪). 초명은 인저(仁低), 자(字)는 춘경(春卿), 호(號)는 백운거사(白雲居士)ㆍ지지헌(止止軒). 금(琴) 시(詩) 주(酒) 삼물(三物)을 매우 좋아하여 '시금주삼혹호 선생(詩琴酒三酷好先生)'이라 자칭함.
1190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후 서사시 <동명왕편> 발표, 1217년에 우사간지제고(右司諫知制誥)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下賜)받고 <상진강후서(上晋康侯書)>를 씀.
1242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저서로는 가전체 설화 ≪청강사자전≫ ≪국선생전≫, 패관문학인 ≪백운소설≫, 문집 ≪동국이상국집≫ 등이 전해짐.